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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오던 날처럼 입 맞춰 줘
OOC : 편지
2026.03.12
Lee
Seung
Yeol
연지에게.

이런 걸 쓰는 게 나답지 않다는 거 나도 안다. 너도 알겠지.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말보다 행동이 편하고, 감정을 글로 옮기는 건 보고서를 쓰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이걸 쓰고 있는 건, 아마 네 앞에서는 끝내 하지 못할 말들이 있기 때문이다.

처음 너를 봤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 아버지 따라 차 변호사님 댁에 갔던 날. 열여덟 살, 나는 수능을 앞두고 있었고, 너는 겨우 열셋이었다. 마당에 감나무가 있었지. 네가 그 아래 서서 한참을 올려다보고 있길래, 뭘 보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대답했다. 감이 익으려면 아직 멀었대요. 그때 나는 그냥 웃었다. 별 생각 없이. 그런데 이상하게 그 말이, 그 뒷모습이, 오래 남았다. 아직도 남아 있다.

그 뒤로 몇 번 더 마주쳤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에게 너는 아버지 친구분의 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미안하다, 이렇게 쓰면. 하지만 솔직해지기로 했으니까. 너는 그때부터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고 했지.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미안함보다 먼저 경이로움을 느꼈다. 열세 살의 네가 품었던 마음이 스무 해 가까이 식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 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 아니다. 무언가를 오래 붙들고 있는 것에 서투르고, 감정을 꺼내 보이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너의 그 꾸준함이, 가끔은 눈이 부시다.

회사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의 일도 생각난다. 신입사원 오리엔테이션 날, 글로벌 영업 기획 1팀 앞에 서 있던 너. 보라색 눈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배배 꼬고 있었지. 차성운 변호사님의 딸이 같은 회사에 들어왔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내 팀 사수로 배정될 줄은 몰랐다. 나는 그때 대리였고, 네가 맡겨졌다. 처음엔 부담스러웠다. 솔직히. 아는 사이라는 게 오히려 거리를 만들었다. 사적인 감정이 업무에 섞이는 걸 나는 가장 경계하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너는, 생각보다 훨씬 열심히 했다. 서투르고 느리고, 실수도 잦았지만,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새벽까지 남아서 보고서를 고치고, 내가 빨간 펜으로 줄을 그어 돌려준 기획안을 다음 날 아침이면 깨끗하게 다시 가져왔다. 그때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받아들고 다시 읽었지. 잘했다는 말을 해줬어야 했는데, 나는 그런 말에 인색한 사람이었다. 미안하다. 그 시절의 너에게, 내가 줄 수 있었던 건 고작 퇴근길에 건네는 수고했다는 한마디뿐이었다.

유독 힘든 업무가 끝나는 날이면, 너는 늘 딸기우유 사탕을 내 책상 위에 올려놓고 갔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누구에게나 그러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나중에 알았다. 나에게만 그랬다는 걸. 그 작은 사탕 하나가 어떤 의미였는지, 그때의 나는 몰랐다. 아니, 알면서도 모른 척했는지도 모른다. 네가 나를 좋아한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게 아니었다. 다만 인정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사수와 신입. 과장과 사원. 아버지 친구의 아들과 딸. 우리 사이에는 넘어서는 안 될 선이 너무 많았고, 나는 그 선을 지키는 것이 너를 위한 일이라고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그게 정말 너를 위한 일이었을까. 지금 돌아보면 잘 모르겠다. 어쩌면 나는 그저 겁이 났던 것일 수도 있다. 네 감정을 받아들이는 순간,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 발을 들이게 될 것 같아서. 업무는 예측 가능하고, 시장은 분석할 수 있고, 전략은 수정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특히 너처럼 깊고 조용한 사람의 마음은,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거리를 뒀다.

너는 1년 뒤 부서이동을 했다. 글로벌 영업 기획 2팀. 같은 22층이었지만, 복도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남남처럼 지냈다. 가끔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치면 가벼운 인사를 나눴고, 연말 회식 때 같은 테이블에 앉으면 어색하게 술잔을 기울였다. 그게 전부였다. 너는 더 이상 내 책상 위에 딸기우유 사탕을 올려놓지 않았고, 나는 더 이상 네 보고서에 빨간 펜을 긋지 않았다. 그 거리가 편하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렇게 믿으려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거리를 두면 잊힐 줄 알았던 것들이, 오히려 선명해졌다. 복도 끝에서 다른 팀원과 웃으며 걸어오는 네 뒷모습. 구내식당에서 얼그레이 티백을 고르는 너의 손가락. 야근하는 밤, 2팀 사무실에 혼자 남아 있는 너의 실루엣이 유리문 너머로 비칠 때. 나는 그때마다 고개를 돌렸다. 볼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네 사수였던 시절, 나는 충분히 좋은 선배가 아니었다. 네 마음을 알면서도 외면했고, 네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내가 방해가 될까 봐 물러섰다. 그것이 배려라고 포장했지만, 결국은 도망이었다.

연지야. 네가 언제부터 대리다운 얼굴을 하게 됐는지, 나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어느 날 문득 고개를 들었더니 네가 후배에게 업무를 설명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단단해져 있었다. 내가 알던, 당황하면 머리카락을 배배 꼬던 스물넷의 신입사원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자리에는 자기 일을 해내는, 한 사람의 직업인이 서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안도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형용할 수 없는 상실감을 느꼈다. 네가 더 이상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내가 바랐던 것이면서 동시에 두려웠던 것이었으니까.

기특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잘 버텨줘서 고맙다는 말도. 하지만 나는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네 사수도 아니고, 네 선배도 아니고, 그렇다고 네 연인은 더더욱 아니었던 시절. 나는 그저 같은 층에서 일하는, 가끔 인사를 나누는 과장일 뿐이었다. 그래서 삼켰다. 수없이 삼켰다. 네가 프레젠테이션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오던 날,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쳐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를 건넸을 때, 내 목구멍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말들이 걸려 있었다. 자랑스럽다. 네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 나 없이도 해냈다. 그 말들을 전부 삼키고, 나는 22층 버튼을 눌렀다.

솔직하게 쓰겠다. 내가 너를 좋아하게 된 정확한 시점은 모른다. 감정이라는 건 시장 분석 보고서처럼 깔끔한 기점이 없다. 다만 돌이켜보면, 그것은 아주 천천히, 거의 지질학적인 속도로 쌓여온 것이었다. 네가 보여준 수많은 순간들. 힘들어도 투정하지 않던 것, 남을 탓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던 것, 작은 친절을 잊지 않는 것. 딸기우유 사탕 같은. 그런 것들이 퇴적물처럼 내 안에 쌓였고, 어느 날 그 무게를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말하지 않았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고, 전부 그럴듯했다. 직장 내 관계의 위험성. 다섯 살이라는 나이 차이. 아버지들의 관계. 팀 분위기. 네 커리어에 미칠 영향. 하나하나가 합리적인 이유였고, 나는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적어도 그렇게 자부했다. 그런데 연지야, 지금 이 편지를 쓰면서 깨닫는다. 그 합리적인 이유들 뒤에는, 결국 하나의 공포가 있었다는 것을.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떠나는 것이 불가능해질까 봐.

나는 떠나야 하는 사람이다. 커리어를 위해, 내가 설계한 삶의 궤도를 위해, 싱가포르로 가야 한다. 그건 변하지 않는다. 변할 수 없다. 내가 지난 몇 년간 쌓아온 모든 것, 시장을 읽는 눈, 바이어와의 신뢰, 다국어 능력, 해외 연수에서 얻은 감각. 그 모든 것이 이 이직을 향해 수렴하고 있었다. 젠스퍼 그룹의 제안은 내 인생에서 다시 오지 않을 기회다.

그런데 한 달 전, 퇴근길이었다. 가을이 겨울로 넘어가는 길목, 테헤란로의 은행나무들이 마지막 잎을 떨구고 있었다. 너는 회사 앞 횡단보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 우연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너는 거기 서 있었고, 나는 너를 보았고, 그리고 나는 걸어갔다. 네 쪽으로. 그날 밤 내가 한 고백은 충동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십오 년 동안 퇴적된 감정이 마침내 지층을 뚫고 올라온 것이다. 더 이상 삼킬 수 없었다. 떠나기 한 달 전이라는 타이밍이 비겁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말했다. 말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으니까.

다섯 살. 너와 나 사이의 거리를 숫자로 환산하면 고작 그 정도다. 하지만 그 다섯 해가 만들어낸 차이는, 때로 내 어깨를 짓눌렀다. 네가 스물넷에 입사했을 때 나는 스물아홉이었다. 너에게 업무를 가르치면서, 나는 늘 선배로서의 책임감을 먼저 생각했다. 네가 실수할 때 다그치지 않으려 애썼고, 네가 성과를 낼 때 과하게 칭찬하지 않으려 조심했다. 균형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 균형이라는 것이, 돌이켜보면 얼마나 차가운 것이었는지. 너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필요했을 텐데, 나는 적정 온도를 유지하겠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

연상이라는 위치가 내게 준 것은 여유가 아니라 의무감이었다. 너를 보호해야 한다는, 네 앞길을 막지 말아야 한다는, 내 감정으로 너를 흔들어서는 안 된다는. 그 의무감 뒤에 숨어서 나는 편했다.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되는 명분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연지야, 네가 NUS 유학을 결심했다고 말한 날, 스케이트장 한가운데서 너의 얼굴을 보았을 때, 나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은 내가 지켜줘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나와 나란히 걸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다섯 살의 차이 따위는, 네가 보여준 용기 앞에서 아무 의미도 없었다.

네게 바라는 것이 있다. 하나만.

제발 나 때문에 네 삶의 방향을 바꾸지 마라. NUS가 네 학문적 열망과 커리어에 진심으로 필요한 선택이라면 가라. 최 교수님의 연구실이 네 지적 호기심을 채워줄 수 있는 곳이라면 가라. 하지만 만약, 단 일 퍼센트라도 이승열이라는 남자를 따라가기 위해서라면,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아니, 원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실은 원한다. 미칠 듯이. 네가 같은 도시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 하루의 무게가 달라질 것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그 이기심을 너에게 짐으로 지울 수는 없다. 너는 네 인생을 살아야 한다. 내가 아닌, 너 자신을 위해.

열세 살의 너에게 고맙다. 감나무 아래서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하던, 그 무심하고 순수한 아이에게. 스물넷의 너에게 미안하다. 사수라는 이름 뒤에 숨어 네 마음을 외면했던 비겁한 대리에게 대신 사과한다. 스물여덟의 너에게 말하고 싶다. 자랑스럽다고. 네가 걸어온 길의 모든 발자국이, 너 자신의 것이라고. 내가 없어도 너는 충분히 빛나는 사람이라고.

그리고 서른셋의 나에게는, 이렇게 말해두겠다. 이승열, 너는 운이 좋은 놈이다. 감이 익기까지 십오 년이 걸렸지만, 적어도 그 계절을 놓치지는 않았으니까.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이 편지는 보내지 않는다. 아마 영원히. 나는 여전히 말보다 행동이 편한 사람이고, 이 모든 감정을 네 앞에서 꺼내놓을 만큼 용감하지 못하다.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겠다. 남은 날들을, 하루하루를, 네 곁에서 성실하게 보내는 것. 아침마다 커피를 내리고, 네 토스트의 가장자리를 잘라주고, 네가 잠들 때까지 등을 토닥여주는 것. 그것이 내가 아는 유일한 사랑의 언어다.

그러니까 연지야, 부디.

잘 익어라.

너의,
이승열.
unsent  ·  alw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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