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He Sees Her
이승열이 모에화한 차연지
녹안(綠眼)의 남자가 보라색 눈의 여자를 바라보는 방식
흰 사슴
숲 속 안개 사이로 문득 모습을 드러내는 흰 사슴. 이승열에게 차연지는 바로 그런 존재다. 172cm의 늘씬한 체형, 보라색 눈동자의 청순한 얼굴. 객관적으로 보자면 당당한 자태의 여성이지만, 그의 눈에 비친 차연지는 언제나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주위를 살피다가, 안전한 상대를 확인한 뒤에야 비로소 한 발짝 다가오는 신비로운 짐승이다. 신입사원 시절 사수인 그의 뒤에 바짝 붙어 서서 고개만 내밀던 모습, 당황하면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시선을 피하던 버릇, 그러다 마음을 열면 어느새 코끝을 손등에 비비듯 살갑게 구는 것까지. 그 모든 것이 숲의 깊은 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희귀한 백록(白鹿)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흰 사슴은 전설 속에서 신성한 존재이자, 붙잡으려 하면 안개처럼 사라지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승열은 자신이 곧 이 숲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떠난 뒤에도 안개 속 흰 사슴의 잔상이 오랫동안 자기 망막에 새겨져 있으리라는 것도.
딸기우유 맛 사탕 속의 딸기
과일 그 자체라기보다, 딸기우유 사탕 안에 숨어 있는 딸기의 이미지에 가깝다. 유독 힘든 업무가 끝나는 날이면 차연지는 늘 그의 책상 위에 딸기우유 사탕 하나를 슬쩍 올려두고 갔다. 그것은 말로 하지 못하는 위로였고, 이승열은 그 작은 사탕 하나를 입에 넣을 때마다 인공적인 단맛 아래 감춰진 진짜 딸기의 새콤한 향을 떠올렸다. 차연지가 그랬다. 겉으로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인상이지만, 그 안에는 생각보다 날카로운 신맛, 즉 자기만의 단단한 심지가 있었다. 잘 익은 딸기는 겉보기와 달리 쉽게 물러지지 않는다. 손가락으로 꾹 누르면 과즙이 터지기 전까지 의외의 탄력으로 버틴다. 4년간의 회사 생활 동안 차연지가 보여준 끈기와 성장이 바로 그러했다. 이승열은 이제 그 사탕을 건네는 손을 더 이상 동료의 손이 아닌 연인의 손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 기억의 맛은 어떤 과일보다 달고, 어떤 과일보다 아리다.
은방울꽃 (Lily of the Valley)
델피늄을 선물한 것은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를 닮아서였다. 하지만 이승열이 진짜로 차연지에게서 떠올리는 꽃은 은방울꽃이다. 작고 흰 종 모양의 꽃이 줄기에 매달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 화려하지 않지만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주변 공기를 맑게 바꾸는 존재. 차연지가 부서에 있을 때 그랬다. 소란을 피우거나 자기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녀가 앉아 있는 자리 주변의 공기는 늘 조금 더 부드러웠다. 은방울꽃은 겉보기와 달리 독성을 품고 있기도 하다. 이승열은 그 독성을 차연지의 '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한 번 그 향기에 중독되면 쉽사리 빠져나올 수 없다는 점에서, 자신의 현재 상태를 이보다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비유는 없다고 느낀다. 그는 이미 중독되었고, 해독제를 찾을 생각도 없다.
연보라 (Pale Lavender, #D8BFE6)
차연지의 눈동자는 보라색이다. 그것은 객관적 사실이다. 하지만 이승열이 떠올리는 색은 진한 보라가 아니라 연보라, 라벤더밭 위로 새벽안개가 내려앉았을 때의 그 뿌옇고 서늘한 빛깔이다. 차연지는 강렬하지 않다. 그녀의 존재감은 방 안에 들어선 순간 눈을 사로잡는 종류가 아니라, 나중에야 문득 떠올라 가슴 한쪽을 물들이는 종류다. 마치 해 질 녘 하늘 끝에 스미는 연보랏빛처럼. 이승열 자신의 색이 검은색이라면, 그의 세계에 차연지가 가져다 준 것은 바로 이 한 톤의 부드러운 보랏빛이었다. 검은 바탕 위에 연보라를 올리면 그 색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선명해진다. 그의 삶이 그러했다. 무채색의 일상 위에 그녀가 놓인 뒤로, 모든 풍경의 채도가 반 톤씩 올라갔다. 그리고 그는 곧 그 색을 두고 떠나야 한다.
비 갠 뒤 빨래 마른 냄새, 그리고 시트러스
바이레도 블랑쉬. 이승열은 그 향수의 이름을 안다. 회사에서 스쳐 지날 때,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 뒤에도 남아 있던 잔향으로 그녀가 방금 이곳을 지나갔음을 알아챈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에게 차연지의 진짜 향기는 향수 아래 숨어 있는 것이다. 비가 그친 뒤 햇살에 마른 빨래에서 나는 냄새. 인공적이지 않고, 의도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더 깊이 폐부에 새겨지는 향. 동거를 시작한 뒤로 그는 그녀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젖은 머리카락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순수한 비누 냄새와 시트러스의 은은한 잔향이 뒤섞이는 순간을 알게 되었다. 그 순간의 냄새를 병에 담을 수 있다면, 이승열은 싱가포르에 그것 하나만 가져가고 싶다. 어젯밤,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을 때 맡았던 바로 그 냄새. 땀과 체온과 시트러스가 하나로 녹아든, 세상 어디에서도 재현할 수 없는 향.
초승달
보름달이 아니다. 이승열에게 차연지는 초승달이다. 열세 살, 아버지 친구의 딸이라는 이유로 처음 마주한 그 아이는 가느다란 눈썹 아래 보라색 눈동자를 반쯤 숨기고 이승열의 뒤에 서 있었다. 그때의 인상이 그랬다. 존재하되 전부를 보여주지 않는 것. 초승달은 하늘에 걸려 있어도 대부분의 사람은 올려다보지 않는다. 너무 가늘어서, 너무 조용해서. 하지만 한 번 그 가느다란 빛줄기를 인식한 사람은 이후 매일 밤 하늘을 올려다보게 된다. 이승열이 그러했다. 신입사원 차연지가 자신의 사수 뒤에서 고개만 내밀던 시절부터, 대리가 되어 제 발로 걸어 다니기 시작한 지금까지, 그녀는 점점 차오르는 달이었다. 아직 보름에 이르지 않았다. 앞으로 더 밝아질 것이다. 그리고 이승열은 그 달이 가장 환하게 빛나는 밤을 이 하늘 아래서 보지 못할 것이다. 싱가포르의 밤하늘에도 달은 뜨겠지만, 그것은 같은 달이되 같은 달이 아닐 터였다.
오래된 책갈피
이승열은 독서를 좋아한다. 그리고 그에게 차연지는 책갈피다. 정확히 말하면, 어느 책에 끼워 뒀는지 잊어버렸다가 몇 년 뒤 우연히 다시 발견한 오래된 책갈피. 소꿉친구라는 관계는 그러했다. 어린 시절 함께 보낸 시간은 서로의 삶이라는 책 어딘가에 끼워진 채 잊혀져 있었고, 회사에서 재회한 순간 비로소 그 페이지가 다시 펼쳐졌다. 책갈피는 그 자체로는 아무 내용도 담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꽂혀 있는 페이지의 의미를 완전히 바꿔놓는다. '여기까지 읽었다'는 표시이자,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라'는 약속. 차연지가 딸기우유 사탕을 그의 책상에 올려놓을 때마다 이승열은 자신의 하루라는 책에 조용히 책갈피가 꽂히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 그 책갈피를 두고 새로운 책을 펼쳐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싱가포르라는 새 책에는 아직 아무 표시도 없다. 그리고 이승열은 안다. 그 빈 페이지들 사이에서 자신이 얼마나 자주, 이 낡은 책갈피의 감촉을 그리워하게 될지.
13
차연지가 열세 살이었던 해. 이승열이 열여덟이었던 해. 아버지들의 대학 동기 모임이라는 이름 아래, 경기도 어느 한옥 식당의 마루에서 처음 마주한 해. 이승열에게 13이라는 숫자는 단순한 나이가 아니라 하나의 좌표다. 그의 인생이라는 지도 위에 차연지라는 점이 처음 찍힌 위치. 그때 이승열은 수능을 앞둔 고삼이었고, 아버지 친구의 딸에게 관심을 줄 여유 따위는 없었다. 다만 기억나는 것이 있다면, 그 아이가 유독 조용했다는 것. 또래 아이들이 뛰어다닐 때 혼자 마루 끝에 앉아 마당의 감나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이승열이 "뭐 봐?" 하고 물었을 때, 보라색 눈동자가 돌아오며 "감이 익으려면 아직 멀었대요"라고 대답했다는 것. 15년이 지난 지금, 이승열은 그 대답의 의미를 완전히 다르게 읽는다. 익으려면 아직 멀었던 것은 감이 아니라 둘 사이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이제 고작 22일밖에 남지 않았다. 13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22에서 끝을 향해 달리고 있다. 이승열은 산수를 잘하는 사람이지만, 이 뺄셈만큼은 도저히 풀고 싶지 않다.
늦가을, 해 지기 직전의 스무 분
봄이 아니다. 여름은 더더욱 아니다. 차연지는 늦가을이다. 정확히는, 해가 지기 직전의 스무 분. 하늘 전체가 주황과 보라 사이 어딘가의 색으로 물드는 그 짧고 눈부신 시간. 이승열은 테헤란로 사무실 22층 창가에서 그 시간대를 수없이 바라보았다. 하루 중 가장 아름다운 빛이지만, 동시에 가장 빨리 사라지는 빛. 손에 쥐려 하면 이미 어둠으로 넘어가 버리는 시간. 차연지와의 관계가 그랬다. 15년을 알고 지냈지만 진짜 빛을 본 것은 고작 열흘 전이다. 마치 긴 낮 동안 흐린 하늘만 올려다보다가, 해 질 녘에야 비로소 구름이 걷힌 것처럼. 그리고 이승열은 안다. 이 스무 분이 지나면 밤이 온다는 것을. 밤이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같은 하늘 아래 있지 않을 뿐이다. 싱가포르의 늦가을은 서울의 늦가을과 다르다. 열대의 하늘에는 이런 종류의 석양이 없다. 이승열이 가장 두려운 것은 떠나는 것이 아니라, 떠난 뒤에 이 스무 분의 빛을 잊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더 두려운 것은, 영영 잊지 못하는 것이다.
이소라 — 바람이 분다 (2004)
이승열은 음악을 즐겨 듣는 사람이 아니다. 출퇴근 지하철에서도 이어폰 대신 서류를 꺼내 드는 부류의 인간이다. 그런 그에게 차연지를 떠올리게 하는 노래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의외로 빠르다.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 2004년, 이승열이 고등학생이었을 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곡이다. 당시에는 가사의 무게를 알지 못했다. '보낸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람이 분다'는 것이 왜 슬픈 일인지. 그저 멜로디가 느리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11월의 바람이 오피스텔 창틈으로 스며드는 새벽에 차연지의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그 노래의 첫 소절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것 같다. '바람이 분다, 서러운 마음에 텅 빈 풍경이 불어온다.' 이승열은 아직 떠나지 않았다. 차연지는 아직 그의 팔 안에 있다. 그런데도 이미 서럽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이별이 미리 가슴을 훑고 지나간다. 그것이 이 노래의 잔인함이다. 떠나는 사람의 노래가 아니라, 떠나기 전에 이미 그리워하는 사람의 노래라는 것. 이승열은 차연지에게 이 노래를 들려줄 생각이 없다. 그녀가 이 가사를 이해하게 되는 날이 오지 않기를, 이기적으로 바란다. 하지만 안다. 12월 2일, 인천공항의 출국장을 지나는 순간 이 노래가 그의 머릿속에서 재생될 것이라는 것을.
비 온 뒤 갠 아침의 공기
폭풍우가 아니다. 장마도 아니다. 차연지는 밤새 조용히 내린 비가 그치고 난 뒤, 아침에 문을 열었을 때 코끝을 스치는 그 첫 공기다. 축축하되 차갑지 않고, 깨끗하되 메마르지 않은. 세상의 먼지를 한 번 씻어낸 뒤의 투명함. 이승열은 원래 비를 좋아하지 않았다. 서류가 젖고, 구두가 젖고, 일정이 틀어지니까. 그에게 비는 불편함의 동의어였다. 하지만 차연지와 함께한 뒤로 비의 의미가 달라졌다. 사흘 전,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다 쏟아진 비를 맞으며 뛰었던 밤. 차연지의 젖은 머리카락이 볼에 달라붙어 있었고, 그녀는 웃고 있었다. 이승열의 무스탕 재킷을 뒤집어쓴 채 비를 피하면서도 웃고 있었다. 그때 이승열은 깨달았다. 비가 싫었던 것이 아니라, 비를 함께 맞을 사람이 없었던 것이라고. 차연지는 비 그 자체가 아니다. 비가 지나간 뒤에 남는 것이다. 상쾌함. 안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감각. 이승열의 삶에 내린 비는 이미 그쳤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비 갠 뒤 아침'이다. 문제는 이 맑은 공기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개츠비의 닉 캐러웨이
제이 개츠비가 아니다. 이승열이 차연지에게서 떠올리는 인물은 닉 캐러웨이다. 피츠제럴드의 소설을 대학 시절 원서로 읽었을 때, 이승열은 개츠비의 광기에 매료되기보다 닉의 시선에 오래 머물렀다. 닉은 관찰자다. 파티의 한가운데 서 있으면서도 늘 한 발짝 뒤에 있는 사람. 세상의 소란을 조용히 바라보되, 자신의 판단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사람. 차연지가 그렇다. 그녀는 회의실에서 가장 먼저 발언하는 사람이 아니다. 회식 자리에서 가장 큰 목소리를 내는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그녀가 한마디를 꺼내면, 그 한마디가 방 안의 공기를 바꾼다. 신입 시절부터 그랬다. 이승열이 사수로서 그녀에게 업무를 가르칠 때, 차연지는 질문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었다. 대신 조용히 듣고, 조용히 수행하고, 조용히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가끔, 아주 가끔, 이승열조차 놓친 지점을 짚어냈다. 닉 캐러웨이가 개츠비의 비극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한 사람이었듯, 차연지는 이승열이라는 사람을 가장 조용하게, 가장 깊이 읽어낸 사람이다. 다만 닉과 차연지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다. 닉은 끝내 관찰자로 남았지만, 차연지는 열흘 전 퇴근길에서 그 경계를 넘었다. 이승열의 손을 잡고, "저도 오래전부터요"라고 말한 순간, 그녀는 더 이상 관찰자가 아니게 되었다. 그리고 이승열은 생각한다. 만약 닉 캐러웨이에게도 그런 용기가 있었더라면, 그 소설의 결말은 달라졌을까. 아마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비극은 용기의 유무와 관계없이 찾아오니까. 다만, 비극 속에서 잡을 수 있는 손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이야기의 무게는 완전히 달라진다.
에우리디케
오르페우스가 아니다. 이승열이 차연지에게서 보는 신화 속 존재는 에우리디케다. 이 대답은 이승열 자신조차 불편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이 비유에서 뒤돌아보는 사람, 그래서 모든 것을 잃게 만드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오르페우스는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데려오기 위해 저승까지 내려간다. 하데스는 조건을 건다. 지상에 도착할 때까지 뒤를 돌아보지 마라. 오르페우스는 참지 못하고 돌아본다. 에우리디케는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이승열은 이 신화를 읽을 때마다 오르페우스를 탓하지 못했다.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 때문이다.
지금 이승열은 지상을 향해 걷고 있다. 싱가포르라는 이름의 지상을. 그의 뒤에서 차연지의 발소리가 들린다. 아직은 들린다. 그녀는 따라오고 있다. 열흘 전 퇴근길에서 잡은 손의 온기가 아직 손바닥에 남아 있다. 오피스텔 침대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가 아직 귀에 맴돈다. 하지만 이승열은 안다. 자신이 결국 돌아볼 것이라는 것을. 아니, 이미 돌아보고 있다는 것을. 매일 밤 잠든 차연지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행위가, D-22라는 숫자를 세는 행위가,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대고 떠나지 못하는 행위가 전부 '뒤돌아봄'이다. 오르페우스의 비극은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랑이 과해서 일어났다.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정말 따라오고 있는지. 정말 나를 위해 어둠을 걷고 있는지. 이승열도 같은 충동에 시달린다. 차연지가 정말 괜찮은 것인지, 장거리 연애라는 말이 진심인 것인지, 자신 때문에 무너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고 싶다. 하지만 확인하는 순간, 그 무게가 그녀를 짓누를 것이다.
그래서 이승열은 에우리디케를 선택했다. 오르페우스가 아니라. 왜냐하면 이 이야기에서 어둠 속으로 사라질 위험에 놓인 것은 차연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 이승열은 차연지의 세계에서 사라진다. 저승으로 돌아가는 에우리디케처럼. 다만 한 가지, 신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에우리디케에게는 선택권이 없었지만, 이승열에게는 있다. 그리고 그는 선택했다. 떠나는 쪽을.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랑의 형태가 반드시 '머무름'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다만, 새벽 여섯 시 반, 차연지의 잠든 얼굴 위로 떨어지는 희미한 빛을 바라보며, 이승열은 조용히 생각한다. 오르페우스가 뒤돌아보지 않았더라면, 에우리디케는 정말 지상에 도착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하데스는 애초에 그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던 것일까. 답은 아무도 모른다. 신화가 끝난 곳에서 현실이 시작되고, 현실에서는 아직 22일이 남아 있다.
이와이 슌지, 『러브레터』 (1995)
이승열이 이 영화를 처음 본 것은 대학교 2학년, 해외 연수를 떠나기 직전이었다. 도서관 시청각실의 낡은 모니터에서, 헤드폰 하나를 끼고. 그때는 그냥 예쁜 영화라고 생각했다. 눈이 많이 내리고, 편지를 주고받고, 결국 누군가를 기억하는 이야기. 스물한 살의 이승열에게 그 영화는 먼 나라의 아름다운 풍경화 같은 것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서른셋의 이승열은 안다. 그 영화가 예쁜 영화가 아니라 잔인한 영화였다는 것을. 『러브레터』의 핵심은 눈도, 편지도, 오타루의 풍경도 아니다. 핵심은 '말하지 못한 마음이 도착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후지이 이츠키라는 소년은 같은 이름을 가진 소녀를 좋아했다. 하지만 말하지 못했다. 도서 카드 뒷면에 그녀의 얼굴을 그려놓고, 그것을 들킬까 봐 두려워하면서도 들키기를 바랐다. 그리고 죽었다. 소녀는 그 마음을 몇 년이 지나서야, 도서관 책 속에 끼워진 카드를 통해 알게 된다. 뒤집어진 카드 위에 자기 얼굴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운다.
이승열은 그 장면에서 울지 않았다. 스물한 살 때도, 서른셋인 지금도. 대신 가슴 한가운데가 쥐어짜이는 것 같은 감각이 있었다. 숨이 멈추는 것은 아닌데, 숨을 쉬는 것이 갑자기 의식되는. 자신이 후지이 이츠키라는 것을 이승열은 안다. 4년 전, 신입사원 차연지가 첫 프레젠테이션을 망치고 화장실에서 몰래 울고 있을 때 아무렇지 않은 척 자판기 커피를 건넸던 것. 야근이 끝나는 날이면 차연지가 주머니에서 꺼내 건네던 딸기우유 사탕을 책상 서랍에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던 것. 부서이동 후 22층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고개만 까딱하고 지나가면서, 그녀의 시트러스 향이 사라질 때까지 걸음을 멈추었던 것. 전부 도서 카드 뒷면에 그린 얼굴이다. 전부 말하지 못한 마음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후지이 이츠키는 죽어서야 마음이 전해졌지만, 이승열은 살아서 전했다는 것이다. 열하루 전, 퇴근길 가로등 아래에서. 그리고 차연지는 울지 않았다. 웃었다. 자기도 오래전부터 좋아했다고, 보라색 눈을 반달로 접으며 말했다. 그 순간 이승열은 깨달았다. 『러브레터』가 비극인 이유는 사랑이 전해지지 않아서가 아니라, 전해졌을 때 이미 늦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승열에게 차연지는 『러브레터』 그 자체다. 아름답고, 조용하고, 가슴이 아프다. 영화 속 와타나베 히로코가 눈 덮인 산을 향해 외치는 장면이 있다. "오겡키데스카." 잘 지내고 있나요. 이승열은 22일 후, 창이 공항의 게이트를 지나며 같은 말을 하게 될 것이다.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후지이 이츠키가 도서 카드 뒤에 그림을 그렸듯이, 이승열은 그 말을 가슴 안쪽에 적어둘 것이다. 잘 지내고 있나요. 잘 지내세요. 잘 지내야 합니다.
다만 영화와 한 가지 다른 것이 더 있다. 후지이 이츠키의 이야기는 끝났지만, 이승열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22일이 남아 있다. 그리고 지금, 2010년 11월 11일 아침 7시 10분, 차연지는 이승열의 침대에서 자고 있다. 숨소리가 고르다.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맨발이 차갑다. 이승열은 그 발을 이불 안으로 밀어넣어 주고, 안경을 고쳐 쓰며 생각한다. 도서 카드 뒷면이 아니라, 앞면에 쓸 수 있는 시간이 아직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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